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지난 5월 전망한 2031년 우리나라 잠재성장률은 1% 수준으로 34개 회원국 중 33위다. 주요 원인은 저출산과 고령화에 따른 생산가능인구 감소다. 통계청에 따르면 전체 인구에서 생산가능인구 비율은 2015년 73%를 최고점으로 2030년 63.1%, 2060년에는 50% 이하로 떨어질 전망이다.
우리나라는 1962년 경제발전계획과 함께 인구억제 정책을 시작했고, 합계출산율이 인구대체 수준인 2.1명 아래로 떨어진 1983년 이후 무려 13년이 지난 1996년에서야 중단했다. 그간 정책 추진 성과가 무위로 돌아갈 것이라는 우려 때문이었다. 같은 기간 우리나라는 압축 경제성장과 압축 인구감소를 동시에 경험했다. 그러나 회복되지 않는 인구감소로 우리나라는 현재 세계 최저 출산국이 되었다. 물리학에서 외부에서 특정한 힘을 받지 않으면 정지 또는 등속도 운동 상태를 지속하려는 성질인 관성(慣性)이 정부정책에도 존재함을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다.
과학기술의 경제 및 사회 기여도가 계속 높아지고 있으며, 추격형에서 선도형 연구개발로의 전환은 지속적으로 논의되어 왔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장기적 연속성을 가지고 추진되어야 할 과학기술분야도 정권교체마다 그간 추진되던 R&D 포트폴리오와 관련 계획들의 수정, 새로운 계획의 조급한 수립과 추진, 정부출연연구조직 개편 등의 논의가 관성적으로 반복되었다. 정책기조는 오랜 기간 일정하게 유지했으나 정책전환 시점을 놓친 인구정책과는 또 다른 5년 단위의 관성이 과학기술정책에 존재하는 것이다.
2031년은 먼 미래가 아니다. OECD 전망이 빗나갈 수도 있다. 그러나 정권이 4번 바뀌는 19년 후 5년 단위로 단절된 과학기술정책 추진으로는 우리나라의 미래 문제 해결과 세계 수준의 과학기술력 확보가 어려울 수 있다. 더구나 최근에는 우리나라 주요 산업을 대상으로 외국 기업과 정부가 연계한 무역 보복과 지적재산권 침해 소송이 증가하는 등 우리나라 과학기술과 산업에 대한 해외 견제도 심화되고 있다. 삼성전자와 애플의 특허 전쟁이 대표적 사례다.
본격적인 대선후보의 공약이 발표되고 있다. 이제는 5년 단위 관성을 넘어 정권교체 후에도 지속가능한 과학기술정책 추진 철학을 담은 공약을 듣고 싶다.
제2차 세계대전 종전 후 미국의 국가 경제와 국민의 삶의 질 향상을 위한 과학기술정책 추진 기본방향을 담은 보고서인 `과학:영원한 프론티어(Science : The Endless Frontier)’가 현재까지도 관련 정책 수립에 영향을 미치고, 일본이 정책 내용에 다소 진부하게 들릴 수도 있는 PDCA(PlanDoCheckAction) 관리 사이클을 자주 언급하는 이유를 다시 생각해 볼 때다.
공고한 철학 기반의 과학기술 공약이 필요한 이유는 또 있다. 70~80년대 노벨상 수상자의 연구성과 발표에서 수상까지 10년 정도의 시간이 필요했으나, 최근엔 20~30대에 이뤄낸 연구성과에 대해 60대 이후에 수상하는 경우가 늘어나고 있다.
세계 최초의 창의적 발명과 발견이 점점 어려워지고, 연구결과가 실생활과 사회에 적용되어 성공을 검증하기까지 오랜 시간이 필요함을 의미한다. 이러한 장기적 안정적 연구개발 활동이 가능한 철학을 반영한 공약을 많은 과학기술자들은 원하고 있고, 이러한 과학기술 투자의 결과물들이 우리나라의 경제사회와 국민의 삶의 질에 긍정적 역할을 미칠 수 있다. 기다림의 미학은 연구개발에도 적용된다.
물론 과학기술 분야 공약의 실현과 가시적 성과창출을 위한 5년 단위 정권기간 동안의 과학기술 정책 추진은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이제는 공약의 가시적 성과에 집착하는 5년 단위로 단절된 정책 추진의 관성을 넘어야 한다. 과학기술정책의 공고한 철학을 바탕으로 장기적 목표를 제시하고 5년 단위로 정진할 수 있는 통 큰고 긴 과학기술정책이 필요하다. 조만간 구체화되어 발표되는 대선후보들의 과학기술 정책 방향에 대한 과학기술계의 관심이 그 어느 때 보다 높을 수밖에 없는 이유다.
차두원 한국과학기술기획평가원 정책기획실장